이탈리아에서 한국인의 저력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다

우리가 탄 알리탈리아 비행기가 뭄바이 국제공항에 내려 급유를 하는 동안 승객들은 기내 좌석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그사이 허름한 쿠르타를 걸친 맨발의 인도인 청소부들이 기내에 들어와 쓰레기와 재떨이의 담배꽁초를 치웠다. 담배가 기호품으로 인정되었던 당시엔 비행기 내 뒤편 좌석은 모두 흡연석 이었다.
제주행 국내선은 비행기는 타 봤지만 난생처음 타게 된 대륙 간 장거리 노선 비행기 내의 이런 장면들은 너무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하늘길이 열려 10여 시간만 비행하면 도착할 수 있게 좋아진 세상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유학생활의 출발지 페루지아역
비행기 안에서 꼬박 만 하루를 보내고 도착한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는 당시 유학생 선배인 조윤기씨가 고맙게도 밤새워가며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개의 무거운 이민 가방을 버스에 싣고 1시간을 로마 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적 풍경과 로마의 햇살은 아름다웠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고 다시 3시간을 달린 후 30여 시간 만에 드디어 긴 여행의 종착지이며 동시에 유학 생활의 출발지인 페루지아(Perugia) 역에 도착하였다.

온 도시가 거대한 박물관
우리가 도착한 때는 1985년 8월 30일 금요일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빛이 눈 시린 한 여름의 오후였다. 우리가 다닐 국립 언어 대학과 가까운 낡은 석조건물 3층에 임시로 마련된 원룸엔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 그리고 의자 2개가 놓여있었고 공동 화장실과 샤워시설은 바깥 복도의 끝에 있었다.
대충 짐을 풀고 학교를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 이어진 돌길 위를 걷노라니 눈에 들어오는 도시의 모습은 전체가 온통 중세와 고대의 유적으로 된 거대한 박물관 이였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광장 우측 산 정상에 자리한 두오모 성당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에트루스코 성벽의 입구는 이탈리아 반도 최초의 아치형 문으로 기원전 4C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2,000여 년 세월 동안 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족적으로 깊이 패어 이어진 돌길 위를 걸어 올라가며 나는 문득 거대한 시공간 속의 나 자신이 한없이 왜소한 존재임을 느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와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패션 강국의 일면을 눈으로 실감하다

산의 정상에 자리 잡은 첸트로(centro ; 중심, downtown을 의미하는 이태리어)에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둘러싸인 탁 트인 광장과 주변으로 잘 정리된 상점들이 있었다. 인구 15만 정도의 작은 도시임에도 광장 맞은편에는 대형 베네통(Benetton) 매장과 구치(Gucci), 페라가모Ferragamo), 아르마니(Armani), 볼사리노(Borsalino) 등 당시엔 수입 잡지를 통해서나 봐 왔던 패션 명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패션 강국의 일면을 눈으로 실감하며 틀림없이 이곳에서 배워갈 것이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저녁을 해결해야 했지만 거처엔 주방시설이 없으니 시내 바(Bar)에 들어가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기로 했다. 길가에는 어느 곳이건 그야말로 몇 집 건너 하나씩 바가 있을 정도로 바가 흔했다.
 그중 한곳으로 들어가 계산대 앞에 서있는 몸집 좋고 잘생긴 이태리 아저씨에게 주문을 하려니 말이 문제였다. 그나마 짧은 영어도 도무지 소통이 안 되고 몇 달간 공부한 이태리어도 별 도움이 안 되니 그야말로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캄보디아 북한 유학생의 담배 디자인을 만나다
웃음 띤 잘 생긴 얼굴에 친절하기 그지없는 바 주인에게 손짓 발짓 바디랭귀지로 겨우 주문을 끝낸 후 계산대 뒤편을 보니 세상 모든 종류의 담배가 가득 진열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양담배로 불리던 수입담배가 엄격히 금지된 처벌의 대상이었던 터여서 이태리 담배를 포함한 프랑스, 독일, 미국, 영국, 일본, 쿠바 등 그야말로 전 세계의 모든 담배를 이렇게 한꺼번에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고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한국 담배는 없었다. 애연가였던 내가 호기 어린 마음에 이런 여러 종류의 신기한 담배들을 두루 섭렵해 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담배 중에는 제법 유명한 킴(Kim)이란 이름의 독일 담배가 있었는데 담배 디자인 국제공모전 수상작으로서 캄보디아에 유학 중인 북한 학생 ‘김바우’의 성을 딴 오리지널 디자인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금속공예 유학생 손님을 만나다
긴 여행의 피곤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은 주말인 토요일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한산했다. 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중 반가운 손님인 이 태익 군이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내 동생과 홍대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이고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이 태익 군은 이탈리아 금속공예 유학을 위해 나보다 3일 먼저 페루지아에 도착해 있었다. 불과 3일의 차이였지만 미지의 세상에서 3일 먼저 그가 몸소 겪고 알아낸 정보들은 우리에게도 당장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길 건너 왼쪽으로 올라가면 콥(coop)이라는 조그만 동네 슈퍼마켓이 있고, 시내버스 몇 번을 타고 기차역 쪽으로 가면 스탄다(standa)라는 백화점 형 대형 슈퍼와 쇼핑몰이 있다는 것, 수돗물은 마시지 말고 생수를 사서 마시되 어떤 상표가 좋고, 쌀은 꼭 이 상표를 사야 밥 뜸이 잘 든다는 것, 물 보다 싼 포도주도 있고 언어대학에 등록을 하고 학생증을 발급받아야 학생 식당인 멘사(Mensa)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등 고맙고 요긴한 것들이었다. 

식당 멘사에선 가성비 좋은 식사 가능
주말을 보내고 유학 생활의 성패를 좌우할 첫 관문인 언어 공부를 위해 언어대학 등록을 마친 우리는 학교와 학생식당인 멘사(Mensa) 그리고 숙소를 오가는 반복적인 일상에 돌입하였다. 일주일에 일요일을 제외한 6일은 점심과 저녁을 모두 시 정부에서 지원하는 학생식당 멘사(Mensa)에서 해결해야 했다.
줄을 서고 순서가 되면 4각형 쟁반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챙겨 치즈와 빵을 담고 토마토 소고기 소스에 파마산 치즈가루를 올린 스파게티 한 접시를 받은 다음 요일별로 다른 메인 코스 요리인 쇠고기 혹은 닭, 돼지, 말고기 중 한 접시를 더 받았다. 자동판매기에서 제공되는 음료는 콜라, 환타, 스프라이트 등이 있었는데 500리라 코인을 넣으면 화이트 와인이나 레드와인을 한잔 뽑아 마실 수도 있었다.

학생이 아닌 경우엔 1인당 5,000리라(한화 3,000원)를 받았지만 학생증을 제시하면 500리라(한화 300원)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 훌륭한 이탈리아 정식 한 끼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다만 부자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 서유럽 국가 등에서 온 유학생들의 학생증에는 구분되는 표식이 있어 4배나 비싼 2,000 리라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성비가 훌륭한 식사였으므로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절약을 생활화했던 유학 생활
페루지아에는 불과 30여 명의 한국 유학생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주로 멘사로 모여들어 함께 식사를 하였다. 누군가 생일이라도 맞으면 멘사의 테이블에 모여앉아 5,000리라(한화 3,000원) 어치 코인으로 10잔의 와인을 뽑고 멘사 음식을 안주 삼아 이탈리안 스타일의 호사스런 생일파티를 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국민소득이 2,500불에 불과했던 당시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의 재정적 현실은 풍족하지 못했다.
모두 선망의 시선과 주변의 부러움을 등에 업고 유학의 길에 올랐겠지만 평균적 삶의 질과 비용이 한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선진국에서의 생활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생활을 꾸려가야 했던 우리의 눈에 세련된 와인 잔으로 테이블 세팅 된 레스토랑에서 그럴듯한 디너를 즐기는 일본 유학생들의 경제적 여유로움은 참으로 부럽기만 했다.

한국인의 놀라운 저력이 자랑스럽다
지금 나는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 시절의 우리를 뒤돌아보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마침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오늘날의 한국을 본다.
국력의 위상에 걸맞게 이제는 여유로운 해외여행이 모든 국민의 생활 속에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보다 질 높은 삶을 추구하는 여유를 갖게 된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우리 한국인의 놀라운 저력이 참으로 자랑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