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패션으로 통하고, 패션은 세상으로 통하며’ 패션과 세상을 하나로 묶는 것은 ‘디자인’이다. 또 ‘디자인’의 변화는 세상의 역사를 알게 하고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한다. 최근 소비자들이 패션과 디자인으로 기울고 있는 관심 정도를 살펴보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패션지오는 이번 호부터 패션업계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도 관심을 보일 수 있는 홍익대학교 강병석 교수의 ‘패션세상’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너의 생각을 조심하라. 말(words)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act)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habit)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character)이 된다.

성격을 조심하라. 운명(destiny)이 된다.

너의 생각이 너의 인생을 만든다.“

세 차례나 영국의 수상을 역임하고 영국을 변화시킨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말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나의 ’인생‘을 만든 이야기이다. 내가 패션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978년 내 나이 스물일곱 때이니 올해로 벌써 40년이 됐다. 패션계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나 이제 막 패션을 시작하는 새내기 패션 지망생들에게 시작한 동기를 질문하면 대다수는 ‘패션이 너무 좋아서‘ 라고 답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생각’이 다소 엉뚱한 데에 있었다. 그것은 환상적인 멋진 향을 담은 향수를 나 스스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됐다. 1978년 당시 나는 대학 졸업 이전인 1977년 12월 공채 18기로 입사한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의 개발부에서 화장품 용기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이미 인턴과정을 마친 후라 6개월여 동안 내 생애 첫 프로젝트인 수출용 신제품 ’삼미진’ 시리즈의 용기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음 프로젝트에 대기 중이었는데, 하루는 부장께서 나를 불러 새로운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다음 시즌에 나갈 신제품 향수 ‘샤르망’의 디자인 작업이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털소재를 사용하는 향수용기 디자인은 모든 화장품용기 디자이너들에겐 큰 소망의 대상이었다.

크리스털소재의 향수용기는 다른 제품에 비해서 용기에 투자할 수 있는 비용이 현저하게 높고 더 큰 비용을 들여서 생산한 용기는 더 아름다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성이 스며든 멋진 향수용기를 디자인하려면 디자이너가 우선 향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부장님의 허가를 얻은 나는 매일 출근하자마자 회사 2층에 자리하고 있는 ‘향 연구소’로 달려가 한국 최고의 엘리트 조향연구원분들의 도움으로 2~3개월 정도 수많은 종류의 향을 조향실험을 거치고 또, 교육을 받으면서 향수의 매력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향수가 패션 디자인의 길 열어줬다

당시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의 향 원액들을 이것저것 조합해 보고 또, 알코홀을 배합해 알데하이드 계열의 향수를 직접 제조해 나만의 향수로 사용해 보면서 나는 큰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방향제품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그 당시 남자인 내 몸에서 풍기는 진한 향수 냄새를 낯설어하고 심지어는 면박을 주는 친구까지 있었지만 나에게 향수는 절대적으로 인류의 가장 멋지고 위대한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모든 동물이 자신의 고유한 향으로 상대방에게 페로몬을 전달하고 사랑에 빠져든다. 식물도 향기로 벌과 나비를 초대하며 또, 사랑을 전달하지 않는가? 꽃잎의 아름다운 자태와 색깔이 패션이라면 꿀의 달콤한 내음은 향수다. 신은 인간에게 이런 멋진 향수를 창작하게 시켰고 또, 페로몬을 전달하고 도파민을 생성해 행복을 선물하지 않았는가!

내게 향수는 낭만이고 사랑이며 오감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전혀 새로운 미(美)의 세계였다. 너무도 멋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향수를 창작하고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조향연구실 안쪽에 자리한 향수제품 샘플실에는 좌우벽면을 길게 채운 유리장 속에 유럽, 미국, 일본 등 전 세계에서 온 수백 종류의 유명 고가 향수제품이 가득 진열돼 있어서 언제든지 보고 직접 사용해 볼 수 있었다.

여러 날 반복해서 향수제품을 꺼내보고 향도 음미해 보면서 살펴보다 보니 문득 머리 속을 파고드는 생각은 ‘샤넬’, ‘랑방’, ‘지방시’, ‘쟝 파투’, ‘피에르 가르뎅’, ‘이브 생 로랑’, ‘구찌’, ‘캘빈 클라인’, ‘켄조’ 등등 거의 대부분의 명품 향수들도 패션 디자이너들이 만들었다는 것과 향수를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길은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고 패션 디자인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깨달음이었다.

매혹될 수 있어야만 패션을 알 수 있다

곧바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병행하려면 야간시간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찾던 중 마침 모교인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 패션 디자인 전공 야간수업이 개설돼 있는 것을 알게됐고 그해(1978년) 11월에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마침내 입학시험을 치뤘다.

오전에 영어시험을 끝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3시간 동안 실기시험이 치러지는데 주제는 ‘꽃과 나비’를 모티브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제시하고 그 소재를 이용해서 의상의 디자인을 제시하는 시험이다. 나는 그 당시 ‘패션을 너무 좋아해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대로 맞춰 입을 수 있는 조금은 남과 다른 스타일의 새 옷이나 멋지게 코디된 차림의 스타일리시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목공예를 전공한 후 용기를 디자인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전혀 생소한 분야인 패션을 스타일화 한 후 이를 완성품으로 제시해야 하는 시험은 결코 쉬운 관문은 아니었다. 게다가 개설된 전공과정은 그 당시에 있었던 미술계열 가운데 국내에서 유일한 석사과정이었기 때문에 서울대, 연대, 이대, 성대 등 소위 일류대학교 출신의 지원자들이 몰려 경쟁이 치열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초조한 날들이 지나가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제 드디어 ‘패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새학기 첫 강의가 시작되는 1979년 3월2일 퇴근 후 날듯이 달려 도착한 홍대 E동 건물 102호 패션 디자인 전용 강의실.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안쪽을 보니 이미 여러 명의 새내기 입학생들과 교수님이 보였다. 목례를 하고 어색한 마음으로 강의실 맨 뒤쪽 빈 테이블로 걸어갔다. 패션에 전혀 무지한 내가 ‘패션의 세상’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나를 ‘패션의 세상’으로 인도한 매개체이며 내가 디자인한 플로럴 계열의 ‘샤르망’ 향수용기는 후일 사내 올해의 최우수 디자인으로 선정됐다. 향수용기의 캡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보이는 진주조개의 형태를 펼쳐 조각해 사용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결과였다. ’매혹적인’이라는 의미가 있는 프랑스어 ‘샤르망(Charment)’은 나의 인생을 바꿔준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 강병석 교수 약력

강병석 교수는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에서 목공예와 인더스트리얼디자인을 전공하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의 개발과에서 용기 디자이너로 재직하는 기간 중 패션에 입문했다. 그 이후인 1980년부터 동사의 미용연구실로 부서를 옮기고 1985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갈 때까지 아모레퍼시픽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광고모델뿐만 아니라 신제품 출시와 부합하는 의상과 헤어의 메이크업을 통합적으로 기획한 후 촬영하고 이를 제안하는 국내 최초의 코디네이터라는 직함으로 왕성하게 활동한다.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1984년에는 ‘제2회 대한민국패션대전’에서 영예의 대상(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85년부터는 유학생활을 시작해 1996년까지 11년 동안 세계 패션의 중심인 이탈리아에서 공부와 실무를 두루 섭렵했다.

피렌체에서 4년 동안 유학생활을 시작한 1986년부터 2년 동안은 동아일보의 기자증을 발급받아 ’멋‘부의 이탈리아 통신원으로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취재를 위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넘나들며 다양한 패션페어를 두루 섭렵했고 글로벌 ‘패션세상’의 시야를 넓혀갈 수 있었다. 특히 기자 활동으로 축적된 이탈리아의 패션산업과 패션기업 등 차별화되고 디테일한 정보를 바탕으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화승, (주)유일교역, 이원재패션 등 한국기업의 현지 생산과 패션제품, 가죽소재 등을 트레이딩하는 지사원 역할을 하면서 실무경험을 축적했다.

1990년부터는 밀라노의 Via Porpora 61-I 번지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스튜디오 ‘Gaanga’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의 교수직을 제안 받아 1993년부터 3년여 동안은 이탈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을 했다. 1996년부터는 11년 동안 지냈던 이탈리아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고 1993년부터 2001년까지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001년 9월부터는 모교인 홍익대학교로 옮겨 지금까지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1993년 9월 국민대 교수로 귀국한 후 최근까지 대한민국 경찰복, 한국 보이스카웃 유니폼, 경찰대학 유니폼, 아모레퍼시픽 오산센터 유니폼, 아람단 유니폼 등을 제작하는 디자인 활동도 병행했다. 특히 개념성 짙고 창작적인 연극 의상과 현대무용 의상을 디자인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이밖에 유명 갤러리에서 초대하는 개인전을 7차례 개최했고 광주비엔날레의 예술의상전(展)을 비롯해 시애틀, 바르셀로나, 도쿄, 삿포로 등에서 개최하는 국제그룹전(展)에 작품을 50여회 이상 출품했다.

사회활동으로는 (사)한국 니트패션 산학협회 회장, 한국 모델리스트 콘테스트 설립·초대 심사위원장, 그룹 프리미에르 회장, 홍익패션협회 회장, 서울 패션디자인센터 운영위원, 한국 기초조형학회 부회장, 바이네르 구두디자인 콘테스트 설립·심사위원, 한국패션협회 운영위원·패션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글- 강병석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