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코디네이터로서 토탈 패션에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패션 디자인 뿐 아니라 메이컵과 헤어스타일 실습 등에 관한 전반적이고 실질적인 공부가 필수적이었다. 나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4층에 자리한 미용연구실에 있는 메이크업 스튜디오에서 메이크업의 기초적인 실기 테크닉과 여러 가지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구체적으로 먼저 도화용 종이 위에 실제로 메이크업할 색상을 수채 물감과 파스텔 등을 사용해 정교하게 얼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다양한 아이디어의 아이섀도우, 립 컬러, 칙 컬러 등 색상과 라인을 포함하는 형태적인 안이 그림으로 도출되면, 그 중 몇 가지를 선별하여 실제 모델의 얼굴에 메이크업을 실시하게 된다. 이때 모델들은 이미 정해진 스타일의 헤어를 완성해서 도착해야 한다. 메이크업이 끝나면 바로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촬영 스튜디오로 옮겨 사진 촬영을 마쳐야 일련의 작업이 끝나게 된다.

일정 기간 촬영된 슬라이드 필름들은 홍보이사에게 직접 전해져 일일이 검토된 후 아모레퍼시픽의 새 광고모델 스카우팅을 위한 자료로 활용된다. 당시 주로 KBS, MBC 등 각 방송사의 신입 탤런트들이 연일 방문하여 테스트 촬영을 받았다. 그때 나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마치 캔버스라도 되는 양 그 위에 메이크업을 통한 예술 행위로서 아름다움의 승화를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국내 최대의 광고비를 투자하던 아모레퍼시픽의 광고 모델로 선택된다는 것은 노출 빈도와 퀄리티를 망라하여 미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단지 테스트를 위한 촬영이었지만 일에 임하는 그녀들의 태도는 참으로 적극적이고 진지하였다.

당시 황혜숙 미용연구실장의 지시로 3개월 이상 계속된 미용 실습은 나에게 제법 프로다운 메이크업 테크닉과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게 해 주었고 이에 관련된 새로운 아이디어도 제시할 수 있게 되였다. 수 십 가지 컬러의 아이섀도우나 립스틱 등의 메이크업 제품을 장착한 유화용 목재 팔레트를 만들어 엄지 손가락에 끼워 사용하는 방법이나 메이크업 전용 브러시 대신 각종 수채화 붓을 사용하여 메이크업을 하는 나만의 새로운 방법은 더 효과적이고 빠르고 편했다.

흥미로운 몇 개월간의 수습 기간이 지나고 본업인 코디네이터로서의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아모레퍼시픽 제품 광고를 위한 홍보실의 광고 전략회의에 참석하고 CF와 스틸 사진 촬영의 방향과 일정을 정한 후 그에 적합한 의상, 헤어, 메이크업과 액세서리 등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업무는 무가지인 월간 ‘향장’지의 표지 촬영과 미용 특집 4페이지에 걸친 컬러 화보에 매달 최신 패션 트렌드와 메이크업 등에 관한 토탈 패션 화보를 싣는 것이었다. 당시 아모레퍼시픽의 향장은 매월 120만부씩 찍어내는 국내 최대의 무가지로서 파급력이 매우 큰 잡지였다. 모든 일들은 늘 시간적으로 엄격한 데드라인이 있는 업무들이어서 정신없이 바빴다. 문제가 생겨 재촬영을 해야 할 경우라도 생기면 모델, 카메라맨, 코디네이터 등을 비롯한 스태프와 연관 거래처 모두에게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발생되곤 했다.

아모레 화장품 광고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한 첫 전속 모델은 1980년 당시 이미 스타의 반열에 오른 배우 이미숙이었다. 당시에는 명동과 소공동 충무로 쪽이 부티크나 헤어살롱 등을 비롯한 모든 문화와 패션의 중심이었다. 때문에 촬영준비를 위해 모델과 동행하여 그 지역의 의상실에서 옷을 가봉하거나 찾고 헤어살롱에서 헤어를 완성한 후 다시 용산 본사로 돌아와 메이컵을 섬세하게 끝낸 후 지하 포토 스튜디오로 내려가 촬영을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아침 일찍 시작해도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늘 바쁘게 진행되었다. 당시 기획 완성된 코디의 헤어는 이가자 헤어살롱 그리고 의상들은 주로 소공동 앙드레 킴, 명동 벵땅의 이용렬 선생님 등 국내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값진 것이었다. 촬영 중에도 내내 곁에서 지키며 세세한 부분까지 포토그래퍼와 함께 의견을 나눠 일을 진행하는 코디네이터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충무로 스튜디오나 헌팅 현장에서의 CF 촬영이 있는 날이면 철야를 하며 여러 스태프들과 함께 고락을 나누어 업무를 진행하곤 했다. 몸은 힘들었어도 내 작업의 결과물들이 매일 TV 나 신문 잡지 등의 광고 매체를 통해 노출 되는 것은 기쁨이었다. 최고의 유명 스타나 모델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은 보람도 있고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이 때 1년 남짓 함께 일한 전속모델 이미숙의 계약이 만료되고 당시 떠오르기 시작하는 신인 배우 금보라가 새 전속모델로 스카우트가 되어 새롭게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81년 새 학기를 맞은 대학원에서는 새로 오신 교수님들이 출강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만남의 인연은 하늘의 뜻’ 이라 했다. 특히 스승과의 만남은 삶의 방향과 질을 송두리째 바꿀 만 한 중요한 인연이다. 나의 경우 당시 새롭게 출강하게 되신 배천범 교수님 그리고 정흥숙 교수님과의 조우가 그렇다. 두 분 모두 전공 필수인 패션디자인을 1,2 과목을 나누어 강의했다. 서울대 미대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신 배 교수님은 한동안 명동에서 ‘석경‘이란 부티크를 운영 하셨고 이후 국민대 의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 이탈리아 마랑고니로 1년간 연구년을 다녀오신 직후였다.  정흥숙 교수님은 서울사대 졸업 후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갓 귀국한 때였다.

당시의 배교수님은 내가 회원으로 속해있던 KSID(한국산업디자인협회)의 초창기 창설 멤버였고 제품디자인 전공자로서 패션 세상에 입문 했다는 희귀한 공통점이 있어 남다른 유대감이 느껴지는 관계였다. 교수님도 나의 코디네이터 작업에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이따금 시간이 될 때면 맥주도 한잔 함께 하면서 내겐 꿈같이 멀고 신비한 나라인 이탈리아의 예술과 디자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항상 창의적 열정으로 가득하셨던 배교수님은 강의 외에도 당시 국내 에서는 불모지와도 같았던 패션쇼의 기획과 연출 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계셨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저녁 나를 부르더니 배교수님이 연출할 패션쇼가 있는데 메이크업을 맡아서 해보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패션쇼의 메이크업을 맡아서 해보기로 했다.

1980년대 대한방직협회에서 매년 주관했던 ‘코튼 쇼’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주목받는 패션쇼로 정동 MBC 방송국 부설인 문화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무대 위에서 오토바이가 질주하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당시 배교수님의 전위적 연출은 수많은 관중의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맡게 된 메이크업도 평범하지 않게 좌우가 비대칭인 아방가르드 룩으로 연출되어 미용연구실의 직원들과 며칠 전 부터 미리 충분한 연습을 거친 후에 메인 쇼에 임하도록 준비했다.

당시 한국의 패션계를 대표할 만 한 기라성같은 디자이너들 그리고 유명 패션모델들과 무대 뒤 피팅룸 안에 함께 섞여 패션쇼를 준비하는 과정은 이제 막 패션 세상에 새내기로 발을 들인 내게는 그야말로 ‘익사이팅’한 경험 이었다. 이후로도 수차례 패션쇼를 치루며 산 경험을 축적해 나아갔으니 바야흐로 패션세상의 안으로 내가 들어와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일들 이었다.

한편 당시의 정흥숙 교수님은 강의 이외에도 외부 활동이 너무도 분주하신 터여서 대학원의 주간 반과 야간 반을 합반하여 한 강좌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하셨다. 주간 반 학생들이 모두 야간 수업시간에 출석하여 수업이 진행 되었는데 처음 만나보게 된 주간 반 학생들은 대부분 야간 반에 비해 나이가 어린 전업 학생들이었다.

정교수님의 합반 덕분에 새로운 얼굴들과 새로운 분위기에서 서로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나는 주간 반의 한 아름다운 여학생과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후 37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려자로 함께 살게 되었으니 정흥숙 교수님과의 특별한 인연은 또 다른 운명적 만남의 인연을 만든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꾼 두 분 교수님들께 그리고 그 특별한 인연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고 있다.